‌AKAGI & KAIJI

‌아카기 - 어둠에서 춤추듯 내려온 천재 & 도박묵시록 카이지 / ‌shameless

평범한 하루

‌“오늘 딱 하루만이라도 평범하게 지내보자.”

바로 전날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던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마시기 좋게 식은 찻잔을 들어 올리려던 아카기는 손을 멈추었다. 그는 코타츠 앞에 서서 그렇게 말하는 카이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카이지는 오늘 혹은 다음날 죽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미 그의 얼굴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듯싶었다.

그야 당연하지. 어제도 사선을 걷다가, 몸 안에 있던 내장을 싹 다 긁어낼 뻔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니 이 말이 카이지의 이른 유언이라 생각하면 못 들어 줄 것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카기가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이고는 “좋아.”하고 간결하게 답했다.

그러자 카이지가 어중간하게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기분 나쁜 미소였다. 카이지는 넋이 빠진 듯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영혼까지 빠져나갈 기세였다.

“적어도 신년은 무사히 맞이하고 싶어.”

카이지가 주르륵 미끄러지듯 벽에 기대어 앉았다. 저 남자한테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정말로 죽을 때가 된 건가. 아카기가 찻잔을 마저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카이지가 슬그머니 아카기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뭘 하면 좋을까, 아카기.”

목숨이 달린 중요한 순간에만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하는 인간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 따위 없다. 당신, 글러먹은 인간이잖아. 아카기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사실을 쉽게 알려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날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살아 돌아온 카이지에게는 잔인한 짓이었다. 아카지는 그 정도로 모질게 구는 남자는 아니었으므로 잠시 대답을 아꼈다.

카이지가 상판 위로 몸을 엎드리고 나른하게 두 눈을 깜박이며 아카기를 올려다봤다. 아카기가 피식, 작게 웃음을 짓고는 카이지의 콧등을 하얀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주었다.

“당신이 정해.”
“그럼 평범하게…”

카이지가 멍하니 입술을 움직였다. 역시 바로 떠오르는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아카기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달력으로 옮겼다. 12월 31일. 오늘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12월 31일. 12월 31일. 굉장히 눈에 익은 날짜였다. 비단 올해의 끝이라서가 아닌,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아. 기억났다.

카이지가 코타츠 안으로 몸을 더욱 구겨 넣으며 말문을 열었다.

“영화나 보러 갈까.”

집 근처에 있는 영화관 앞을 지날 때마다 ‘12월 31일 대개봉’이라는 문구를 내건 영화 포스터들을 자주 보았다. 그래서 12월 31일이라는 날짜가 익숙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카이지가 그렇게 말하자 아카기가 찻잔에 입술을 가볍게 적셨다 떼었다.

“평범한 연인처럼?”

달그락.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엑. 그러자 카이지가 괴상한 소리로 탄식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아카기, 너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도 할 줄 알았냐?”
“어디가 낯간지럽다는 거야. 연인이라는 말이?”
“그래! 그 말! 우리가 여, 연인이라니…”
“같이 자고, 먹고, 사는데 사귀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카이지 상?”
“그래도 우린 그런 게 아니라…”
“‘연인’이 아니라?”

아카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카이지를 바라보았다. 열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카이지가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코타츠가 뜨거워서 빨개진 얼굴은 아닌 성싶었다.

“…우린 좀 더 건전한… 그, 뭐라 해야하지…?”

건전한? 그 말에서 아카기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가족’…같은 거잖아.”

카이지가 점점 줄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허공 어딘가에 걸쳐두었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아카기의 눈치를 살핀 뒤 제 앞에 있던 찻잔을 들어올렸다.

홀짝. 카이지가 가볍게 차를 들이켰다. 금세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서 머리를 굴리는 꼴이 그다웠다. 어울리지도 않는 ‘평범’ 타령을 하는 모습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평소다운 그의 모습이었다. 위기에 닥쳤을 때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머리를 굴리고 꿈틀대는 것이. 그러나 아카기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죽인다 했어, 팔을 달라 했어.

그냥 ‘연인’이라는 관계의 정의 한 번 내린 것뿐인데 그 정의를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카기가 한쪽 손으로 제 턱을 괴고는 다른 손으로는 상판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에 카이지는 몸을 움찔 떨었지만.

“가족이라…. 뭐 그것도 나쁘진 않네.”
“그렇지! 연인이라니… 너랑 내가 무슨…”
“그럼 평범하게 아빠랑 엄마가 할 법한 일을 해볼까?”
“푸헉-!”

콜록콜록. 카이지가 한 번 더 들이켰던 차를 내뿜고는 기침을 해댔다. 그에 아카기가 킬킬 웃으며 코타츠에서 한 쪽 다리를 꺼내 세워 접었다. 카이지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카기를 마주보았다.

“컥- 아, 아카기… 우린… 그런 의미의 가족이 아니라…”
“아니라?”
“구, 굳이 말하자면… 혀, 형제!”
“헤…”
“그래! ‘형제’같은 거다! 펴, 평범한 형제!”

카이지가 더 이상의 반박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아카기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좋아. 그럼 카이지 상이 가르쳐줘. 평범한 형제는 오늘 같은 날 뭘 하는데?”
“어… 음….”

카이지가 난처한 얼굴로 아카기를 보고 대답을 망설였다. 평범한 형제들이 무엇을 하는지, 누나밖에 없던 그가 알 턱이 없었다. 카이지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눈싸움 할까…?”하고 말했다.
아카기가 흥미롭다는 듯이 호오…하고 탄식하며 제 턱을 매만졌다.

“싸움이라….”
“아카기. 눈싸움은 그런 싸움이 아니라… 눈을 동그랗게 뭉쳐서 던지고 노는 놀이라는 건데…”
“싸움이 된다면 절대 봐주지 않아, 카이지 상. 한쪽이 죽을 때까지 한다.”

아카기가 카이지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그의 말허리를 잘라내고는 낮게 웃었다. 그러자 카이지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눈싸움은 도박이나 싸움이 아니라고! 놀이! 유희! 오락이다!”
“결국 갬블이라는 거잖아.”

아카기의 꽉막힌 대답에 카이지가 울먹이며 “내가 생각이 짧았다. 네가 그런 놈인 걸 잠시 잊고 있었어.”하고 말했다.
카이지는 ‘아카기는 진심이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반면에 아카기는 ‘역시 이 남자는 질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장난인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네. 오늘 딱 하루만이라도 평범하게 보내고 싶었는데….”

카이지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다시 상판 위에 몸을 엎드렸다. 아카기가 몸을 일으켜 술과 담배 그리고 마작을 가져왔다.

“둘이서 하자고?”
“응. 1월 1일이 올 때까지… 계속 한다.”

카이지가 상판 위에 올려진 패들을 보며 물었다. 아카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패를 섞었다. 카이지가 한숨을 내쉬며 패를 섞는 손을 더했다.

“뭘 걸 건데?”
“당신이 이기면 돈을 주지.”

그리고는 “카이지 상은 돈을 제일 좋아하잖아.”하고 덧붙여 말했다. 카이지는 반박하지 못하고 “난 이 승부에 걸 돈이 없어, 아카기. 어제 다 털린 거 알잖아.”하고 말했다.

“그럼 당신이 돈 대신 자주 거는 걸 걸어.”
“자주 거는 거…?”
“몸.”

아카기가 패를 섞던 손을 잠시 멈추고, 담배를 하나 꺼내어 물고는 불을 붙였다. 그러자 카이지가 “설마 내…”하고 말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아카기가 가만히 눈웃음 쳤다.

“잃기 싫으면 이기면 되잖아?”
“…이래서야 평소와 다를 바 없잖아.”

투덜거리듯 카이지가 말했다. 그래도 그 말은 결국 하겠다는 뜻이었다.

아카기가 잠시 말없이 한쪽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채로 카이지를 길게 응시했다. 그 시선에 패를 섞던 카이지의 손이 멈칫했다. 아카기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다면 이게 바로 평범하다는 거 아니겠어, 카이지 상?”

카이지가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아카기가 입술에 담배를 다시 물리고는 패를 마저 섞었다.

“더 나위 할 것 없이 평범한 하루야.”

…우리의.

아카기가 담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카이지가 아까보다 더욱 붉어진 얼굴을 감추듯 고개를 숙였다. 그래봤자 다 보이는데. 그러나 아카기는 속으로 한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때 오늘 하루 종일 죽은 시체처럼 미동 없던 카이지가 두 눈을 반짝이며 아카기를 마주했다. 아카기도 그런 카이지가 마음에 든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카이지가 굳은 결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절대로 이긴다.”
“두고 보지.”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는 평소와 다름없이 패산을 쌓기 시작했다. 식어버린 찻잔의 차는 반도 줄지 않았다. 이 찻잔을 다시 데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찻잔은 곧 평소와 다름없이 재떨이 용도로 쓰이고 말 것이 뻔하다. 그럼 그들은 다시 쓸 만한 찻잔을 사러 함께 집밖을 나선다. 재떨이가 되어버린 찻잔을 아깝다고 카이지는 투덜거릴 것이고, 아카기는 현관 근처에 찻잔을 겹쳐 쌓아올린 탑에 하나를 더 올리겠지.

그것이 균형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평소처럼. 당연하게. 평범하게.

오늘은 새해를 하루 앞둔, 올해의 마지막 날. 평소와 다름없이 평범한 하루였다.

그리고 내일은 새로운 해가 밝을 테지만, 곧 재떨이가 될 이 찻잔들을 대신할 물건을 그들은 사러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이지는 투덜거리고 아카기는 찻잔으로 탑을 쌓고, 그들이 자주 가는 골동품 가게로 향할 것이다. 커다란 한방을 위해 제 한 몸 아끼지 않는 남자와 목숨을 담보로 해야만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남자, 이 비이상적인 두 사람이 함께라면 평범한 일상도 가능하다니 아이러니다.

그래도 아카기와 카이지는 곧 밝을 새해에도 그렇게 하루를 보낼 것이다.

누가 봐도 평범한 하루를.

함께―

마침.

‌AKAGI & SAWADA & GINJI & WASIZU & ICHIKAWA

텐 - 텐호의 길을 걷는 남자 & 은과 금 & 아카기 - 어둠에서 춤추듯 내려온 천재 / Designer